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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대한민국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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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탐욕의 대륙 유럽
1452년 동로마가 오스만투르크제국에 멸망했다. 지중해를 통해 육로를 거쳐 중국과 교역하던 지중해 국가들은 그 교역로에서 퇴출됐다. 대서양을 보고 살던 포르투갈은 무역로를 개척하기 시작해 아프리카와 인도, 필리핀에 닿았다. 이어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과 프랑스가 대서양과 태평양으로 배를 띄워나갔다.
2장모든 것은 그해에 시작되었다
1473년 2월 19일 폴란드, 코페르니쿠스가 태어났다. 대항해시대에 세상은 격변 중이었다. 유럽은 대서양 항로를 찾아 나서고 있었다. 1450년 독일 마인츠의 인쇄업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사용해 책을 인쇄했다. 구텐베르크는 ‘면죄부’를 대량으로 찍었다. 1517년 독일 성직자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선언문 또한 인쇄술로 2주 만에 유럽 전역으로 전파됐다.
코페르니쿠스는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웠지만 천동설대로 움직이지 않는 밤하늘을 보고 지동설을 주장했다. 그 생각을 정리한 ‘짧은 해설서’를 동료 지식인들에게 돌렸고 이를 읽은 천문학자들이 출판을 재촉해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논문이 세상에 나왔다. 1543년 5월 24일 코페르니쿠스는 책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유럽 인류는 그날부터 신으로부터 해방됐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 프랑스 알사스 스트라스부르 성당 천문시계에 있는 초상화(1570년대)를 1989년 복원한 그림이다. 자화상을 토대로 그린 가장 오래된 초상화다.
1543년 일본 다네가시마에 포르투갈인이 상륙했다. 도주 도키타카는 그들로부터 철포를 구입해 역설계를 명했다. 1556년에 이미 일본 전역에 철포가 30만 정이 넘었다.
유럽은 욕망을 분출할 시장을 찾고 있었고 일본은 시장과 구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1555년 조선, 대마도인 평장친이 철포를 가지고 들어왔다. 조선 국왕 명종은 철포 제작을 불허했다. 1589년, 대마도주가 선조에게 철포를 헌상했다. 철포는 무기고에 들어간 뒤 나오지 않았다. 1592년, 조선에 쳐들어온 도요토미의 철포 부대에 참패했다.
대장장이 야이타 킨베의 동상. 다네가시마 도주 도키타카는 소총 2정을 구입했고 대장장이 야이타는 이를 국산화했다. 이후 동아시아 역사는 너무나도 다르게 흘러갔다.
1542년 조선, 풍기군수 주세붕은 풍기에 있는 죽계계곡을 백운동이라 명명했다. 송나라 주자가 살던 백록동을 흉내냈다. 그곳에 고려 때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을 기리는 사당을 지었다. 세상이 앞으로 나가고 있는데, 조선은 퇴화된 철학 성리학을 수용했다.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소수서원). 1543년, 조선 성리학시대의 실질적인 서막이었다.
3장불길한 징조
1448년 9월 13일, 세종은 신무기 시스템 구축 완성을 선언했다. 세종은 이슬람, 원나라 과학을 계승한 역법과 천문 관측기구를 만들었고 천문과 기후 측정으로 농업 진흥에 힘썼다. 하지만 이후 성리학과 사대주의에 빠져 과학을 경시했다. 1442년 세종은 천문대를 중국 사신이 볼까 은폐했다. 1598년 선조는 중국이 화를 낼까 조선이 만든 역서를 금했다.
조선이 성리학의 절벽에 가로막혔을 때 일본은 철포로 시작된 교류를 통해 전진했다. 17세기 일본 과학은 조선을 추월했다.
박안기가 일본 과학자에게 칠정산역법을 가르쳐준 사실을 기록한 시부카와 하루미(澁川春海)의 《춘해선생실기 (春海先生實記)》.
1503년 5월 18일 김감불과 김검동이 납으로 은을 제련하는 회취법을 발명했다. 조선정부는 이에 대해 무관심했다.
1526년 일본, 이와미은광이 발견됐다. 동서 교류에 필수적인 거래수단이었다. 기술이 부족한 일본은 조선에 와서 은을 제련해 갔다. 7년 뒤 상인 가미야 주테이는 종단, 계수를 초빙해 '회취법' 제련술을 도입했다. 이 기술자들은 조선인이었다. 14년 후 일본은 은 생산 대국으로 변신했고 조선은 그렇지 못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은화 '문록석주정은'을
만들어 철포와 군선을 제작했다. 1592년
4월 13일 철포부대를 포함한 1만8000여
일본군이 조선을 공격했다. 임진왜란이다.
조선이 무시한 철포와 조선이 부도덕하다고
몰아붙였던 은의 역습이었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작한 ‘문록석주정은(文祿石州丁銀)’. 이와미은광을 장악 한 후 임진왜란(문록의 역) 철포와 배 같은 무기 구입을 위해 이와미 은으로 만든 은화다.
포르투갈이 시작한 대항해 시대 물결을 타고 유럽 문명이 아시아로 향했다. 1549년 7월 27일 예수회 하비에르가 일본 가고시마에 상륙했다.
1582년 일본 '덴쇼견구소년사절단' 소년 4명이 유럽으로 떠났다. 1584년 포르투갈에 도착한 소년들은 교황을 만나고 유럽과 가톨릭문화를 경험한 뒤 귀국했다.
일본 나가사키현 오무라시 모리조노(森園) 공원에 있는 덴쇼견구소년사절단(天正遣歐少年使節團) 동상.
4장요동치는 천하
1653년 8월 하멜 일행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선을 타고 제주도에 난파했다. 이들은 13년 동안 잡일을 하며 조선에 억류됐다가 1666년 일본으로 탈출했다.
1600년 네덜란드 상선을 타고 일본에 표착한 영국인 애덤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미우라 안진으로 이름을 바꾸고 상급 사무라이 신분과 토지, 돈을 받고 에도 막부 외교 및 통상 고문으로 일했다.
1637년 일본은 쇄국과 함께 포르투갈 상인들을 추방했다. 4년 뒤 데지마는 선교에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는 네덜란드인이 차지했다. 데지마를 통해 책과 진귀한 물품이 유입됐다. 네덜란드어로 된 유럽 문명, '란가쿠'였다. 일본 지식사회는 데지마를 통해 세계를 파악하고 근대 문물 수용했다.
맨 먼저 자극받은 사람은 의사들이었다. 야마와키 도요는 첫 해부 후 <장지> 펴내고 '요 임금 내장도 내장이고 폭군 걸의 내장도 내장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에도에만 600군데가 넘는 서점과 이동도서관을 통해 란가쿠 책이 구름처럼 퍼져나갔다. 1774년 의사 스기타 겐파쿠와 동료들이 네덜란드 해부학서<타펠 아나토미아>(1734)를 번역해 <해체신서>를 출간했다. 일본은 유럽 문명을 일본화 해나갔다.
조선 정조는 낡은 정보조차 왕실도서관에 두고 공유하지 않았다.
1791년 조선에서도 서학(기독교)이 문제가 되니 웬만한
서양 서적은 모두 불태워버렸다. 해부학서적
<태서인신개설>도 함께.
일본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에 있었던 인공 섬 데지마(出島)는 에도시대 세계를 향해 열린 문이었다. 네덜란드는 이 작은 섬에 무역사무소를 만들고 일본과 교역을 했다.
병자호란 마지막 날인 1637년 2월 24일 조선 인조가 청에 항복했다. 권력층은 복수는커녕 명을 배신하고 오랑캐에 충성을 맹세한 변명으로 멸망한 명나라 대신 중화 문명을 계승하고 있다는 조선 중화를 내세웠다. 고상한 정신승리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1633~1850년까지 에도를 166회 방문하며 그때마다 막부에 국제 정세 보고서를 전달했다. 에도 막부는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등장, 페리 제독의 미군 군함 이름과 규모를 미리 알았다.
조선 통신사가 성리학과 중화를 얘기하면 일본은 근대지식으로 맞받아쳤다. 조선이 성리학에 세뇌돼 있을 때 일본은 주자학을 넘어 양명학과 란가쿠로 논쟁하고 있었다. 1748년 10차 통신사를 수행한 조선 의사 조숭수, 일본 의사가 광견병에 대한 조언을 구하자 "돼지 똥물을 쓰되 마시면 된다"고 답했다.
1600년대 후반 일본은 4킬로미터마다 이정표가 서 있고, 1653년 상수도가 완공돼 에도시민은 수돗물을 마셨다. 조선은 근대화된 일본을
보고도 배우는 바가 없었다. 성리학이
대량생산한 학자와 그 지식 권력
시스템이 문제였다.
1808년 지리학자 홋타 니스케(堀田仁助)가 제작한 지구본(시마네현립고대이즈모역사박물관). 데지마를 통해 습득한 유럽 학문 란가쿠(蘭學)는 일본 사회를 전방위적으로 변화시켰다.
5장뒷걸음치는 천하
명이 멸망해갈 때 베트남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독립했다. 일본은 독립과 자주를 선언했다. 후금은 아예 명을 멸망시키고 황제국이 되었다. 조선은 아버지 명나라를 이어받은 '소중화'였다. 조선은 제국을 한 번도 세우지 못했다.
충북 괴산 화양계곡에는 '만절필동'이라 적혀 있다.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어떤 역경에도 한결같다'라는 선조 글씨다. 이곳에 있는 만동묘는 송시열(1607~1689)의 유언에 따라 지은 명나라 황제를 모신 사당이다.
송시열에게는 오로지 주자와 명에 대한 사대밖에 없었다. 효종의 북벌의지를 꺾으며 주자를 읽으라고 했다. 1689년 송시열이 죽었다. 명나라 황제를 기리는 사당을 지으라 유언을 남겼고 1704년 제자들이 만동묘를 지었다. 이후 조선은 명나라를 '제사'지내며 스스로 후계자가 됐다.
숙종은 궁궐 안에 명나라에 황제에 제사 지내는 대보단을 짓고 청나라에 숨겼다. 정조는 사대라는 성리학 이념을 권력 유지와 강화에 이용했다.
충북 화양동계곡에 새겨진 ‘萬折必東(만절필동)’. 선조 글씨다.
선비, 사대부는 비싼 책으로 성리학을 공부했다. 독점된 학문을 통해 권력을 획득한 사대부들은 그 권력 유지를 위해 다른 학문을 배척했다.
일본은 성리학을 장려할 뿐 다른 학문을 금지하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담은 천체 안내서도 출판됐다.
18세기 일본이 데지마를 개방하고
난학을 장려할 때, 정조는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이 이단이라고
선언했다.
정조는 중국 서적 수입을 일절
금했다. 문체도 고문체만 쓰도록
했고 수원화성을 지은 거중기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말라고
명했다.
일본 란가쿠학자 모토키 료에이가 펴낸 ‘신제천지이구용법기(1793·와세다대학교)’. 100페이지에 걸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소개한 통속 안내서다.
6장아편전쟁과 실종된 조선 도공
사가번 번주 나베시마 나오마사는 유럽문물을 적극 도입해 근대 용광로를 들여오고 대포를 제작했다. 대포를 제작한 용광로는 조선 도공 기술에서 나왔다.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근대 공업단지 '집성관'을 설치하고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투입해 근대 산업을 구축했다.
사가현 혼마루역사관 정원에 있는 대포.
정유재란 때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조선 도공들을 데려와 도자기를 굽게 했다. 이삼평은 아리타에서, 이작광과 이경은 히로시마, 하기에서 박평의는 사쓰마에서 도자기를 만들었다.
일본 도공들은 중국 염료법을 배워
화려한 아리타식 채색 자기를 만들었다.
1867년 아리타 자기는 파리만국박람회
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조선에서 천민이었던 도공들은 귀국하지
않았다. 그들이 만든 일본 요업산업은
훗날 메이지유신의 모태가 됐다.
18세기 나가사키 데지마를 통해 유럽으로 수출된 아리타 도자기.
영조는 당파 싸움, 사치, 술을 금했다. 극도의 긴축경제로 인해 농업을 제외한 모든 경제적 활동이 활성화되지 못했다.
조선은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을 도덕 사회의 악이라며 억제했다. 그 결과 생산을 맡은 직업군들은 규격품만 만들고 창조력은 발휘하지 못했다.
성리학 도덕주의자들은 백성들만 규제하고 지식권력층은 금지 품목, 술을 자유롭게 즐겼다.
조선이 자랑하는 청화백자(왼쪽). 하지만 그 찬란한 작품을 만든 장인 이름은 단 하나도 기록에 없다. 경기도 광주 분원에서 나온 자기 파편에는 도공 이름으로 추정되는 ‘손맜소니(?)’라는 손글씨가 남아 있다(오른쪽).
7장일어서는 일본
1866년 권력 위기를 느낀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를 탄압했고 개방의 기회를 다시 한번 놓쳤다. 병인양요를 통해 서양 군사력을 경험하고도 대비하지 못한 채 신미양요에서 참패했다. 1871년 미군이 퇴각한 날 조선정부는 교통요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반면 일본은 고위 관료와 유학생 107명 이와쿠라사절단이 2년간 세계여행을 떠나 근대 문물을 배웠다.
경북 구미 국가산업 2단지 돌고개(석현) 언덕에 서 있는 척화비(斥和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평하는 것이요, 화평은 매국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요시다 쇼인이 세운 서당 쇼카손주쿠에서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조선의 원흉들이 배출됐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진 서군, 조슈번이 260년뒤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을 옹립했다. 일본 근대화 작업, 메이지유신이 시작됐다.
근대화에 목숨을 건 유신지사들이 메이지유신을 이끌었다.
1857년 조슈번 하기시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만든 사립학교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쇼인은 이 서당에서 존왕양이와 막부 타도를 내건 혁명가집단을 길렀다. 1년 2개월 남짓 운영된 이 학교에서 일본 근대사의 핵심 세력이 배출됐다.
청나라는 세계 정세에 둔감했다. 영국 매카트니 사절단이 통상 허가를 요청했지만 건륭제는 거부했다. 그리고 47년 뒤 아편전쟁에서 청은 허무하게 패배했다.
조선과 강화도조약 체결을 위해 일본 특사 모리 아리노리가 청 북양대신 이홍장을 만났다. 젊은 모리는 이홍장에게 "일본의 미풍양속은 남의 장점을 따라서 배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청일전쟁은 양국 유학생들의 전쟁이었다. 근대와 유학생에 대한 양국 정부의 자세와 의지가 승패를 갈랐다.
일본 시모노세키 ‘일청강화기념관’에 있는 회담 장면 그림. 위쪽 이마가 넓은 사람이 일본측 전권변리대신 이토 히로부미, 아래쪽 오른쪽 첫번째 뒷모습이 청나라 전권대신 이홍장이다. 양국 협상단 절대다수가 유학파였다.
8장붕괴되는 조선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은 결과적으로 백성을 고급 정보로부터 고립시키는 역할을 했다. 성리학 이념을 전파하는 '삼강행실도'는 한글로 잘 풀이된 반면 그 외 고급 지식은 음독만 해서 일반 백성들이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책은 국가에서 편찬하고 출판하고 유통했다. 선비를 제외한 백성은 고급 서적으로부터 격리됐다. 백성은 농업과 충효에 관한 글을 읽었다. 왕실을 부정하는 청나라 책이 유통되자 영조는 이를 유통한 책쾌 대학살을 시도했다.
1450년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활자 인쇄술은 유럽이 다양한 지식을 습득할 환경을 만들었다. 반대로 오스만제국에는 그로부터 277년 뒤에야 인쇄소가 설치되었고, 이후 관료가 소장한 책 1267권 중 928권이 종교서였다. 일본에서는 서점과 대여점이 활발하게 영업했다.
조선에 민간 서점이 본격적으로 생겨난 때는 1905년부터다. 정보의 독점에 각성된 대중의 부재가 조선의 개화를 막았다.
선조 때 만든 《맹자 언해》. ‘數촉罟고를 不불入입洿오池지면 魚어鼈별를 不불可가勝승食식也야’라고 토를 달고 ‘ 數촉罟고를 洿오池예入입디 아니하면 魚어鼈별을 不가히 이긔여 食식디 몯하며’라고 풀이했다. 이를 ‘촘촘한 그물을 웅덩이에 못 넣게 하면 물고기와 자라가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불어날 것입니다’라고 읽을 수 있는 백성은 얼마나 됐을까. 경전 언해는 철저하게 성리학 지식인을 위한 작업이었다. 반면 일반 대중에게 성리학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만든 ‘삼강행실도’는 책 위쪽에 순 언문으로 뜻을 풀이해놓았다.
13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한 하급 군인들은 1882년 반란을 일으켜 민씨 정권 타도를 외쳤다. 이어 1884년 젊은 엘리트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두 사건 모두 진압을 위해 고종과 민씨정권은 청에 군사를 청했다. 청일전쟁(1894년)까지 청나라 식민지가 되어 민씨 세력은 청나라를 등에 업고 부패정치를 했다.
개화파 원로 유대치, 박규수 영향을 받은 서울 북촌 젊은 노론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청으로부터 독립하고 부패 민씨 정권을 타도하려는 쿠데타였다.
갑신정변과 관련돼 체포된 사람 23명은 처형되거나 유배됐다. 관련된 가족들도 자살하는 등 뿔뿔히 흩어졌다. 김옥균은 1894년 고종의 자객 홍종우에 의해 청나라 상해에서 암살됐다.
1884년 갑신정변 후 일본으로 망명한 갑신정변 주인공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터졌다. 고종 정권은 진압을 위해 청나라 군사를 불렀다. 일본군이 따라왔다.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터졌다.
1896년 민비 암살 사건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주했다. 고종은 이곳에서 갖가지 국가 이권을 열강에게 넘겼다.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초대 황제로 등극했다. 고종은 독립과 부강 대신 허세를 택했다. 금고가 텅 비었으나 황제 도장을 만들고, 독일에서 철모를 수입했다. 1903년 세입예산 1076만원 중 98만원이 빚이었다. 황제 직속 군사기구인 원수부를 창설해 군사력을 황궁 수비와 치안에 사용했다. 각종 무명잡세를 부활시켜 세금을 거뒀다. 불탄 경운궁도 중건했다. 사치 또 사치였다.
1896년 서재필이 망명지 미국에서 귀국해 <독립신문>을 만들었다. '만민공동회'를 개최했으나 1898년 고종은 독립협회를 강제해산시켰다.
1899년 8월 17일 법규 교정소는 한 달 보름 만에 대한제국의 헌법 '대한국국제'를 내놓았다. 2~9조까지 황제의 권리에 대한 조항밖에 없는 기이한 법이었다.
아버지 대원군에 이어 고종 본인이 중건을 완성한 조선 법궁 경복궁. 중건에는 800만 냥이 들었다. 고종은 대한제국 황궁으로 경복궁 대신 경운궁(덕수궁)을 선택했다. 1904년 경운궁 또한 불이 나자 795만 냥을 들여 중건했다.
황제가 된 고종은 각종 사치에 광적으로 집착했다. 즉위 40주년 축하 행사가 줄을 이었다. 허세 그 허세. 미국공사 알렌은 고종을 로마 황제 네로 같은 악인으로 규정했다. 경복궁을 버리고 덕수궁에 앉은 황제는 평양에 또 '풍경궁'을 착공했다. 즉위 40주년 기념식 '칭경예식'을 거하게 예정했으나 콜레라로 거듭 연기되다가 무산됐다. 나랏돈 13.2%가 허공에 사라졌다. 일본으로부터 군함 양무호를 구입했다. 하지만 이는 국방용이 아닌 칭경 40주년 기념식용이었고 그나마 폐기 직전인 고물이었다.
1907년 부산세관 선원훈련선으로 전용된 양무호. /해군사관학교박물관
9장옹졸한 멸망
1904년 러일전쟁 개전 직후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30만 엔을 받았다. 1905년 을사조약 직전 고종은 2만 엔을 받았다.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 때 고종은 자기가 보낸 적 없다고 발뺌한 뒤 강제 퇴위됐다. 3년 뒤 '아무것도 없는' 나라 대한제국이 사라졌다.
기사박종인 디자인정다운 권혜인 장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