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
년1866
년서기 1864년 1월 16일 토요일, 음력으로는 1863년 12월 8일이다. 이른 아침 해뜰 무렵 철종이 죽었다. 차가운 공기를 헤치고 영의정 김좌근과 도승지 민치상이 일행을 이끌고 창덕궁 돈화문을 나섰다.
1832
년1840
년1840년 청나라가 영국이 수출한 아편을 불태우자 이를 핑계로 영국이 무역항을 확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킴.
1842
년1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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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부터 조선 바다에는 서양 상선과 군함이 출몰하며 새로운 시대를 알리고 있었다.
대륙에서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무장한 유럽 제국이 황제 청나라를 위협하고 있었다. 바다 건너 일본은 그 유럽에 문호를 개방하고 근대 문명을 차근차근 수입하며 부국과 강병의 길을 걷고 있었다. 26대 지도자 고종이 친정을 선언한 1873년, 조선 왕국 나이는 481세였다.
1641
년1855년 일본 중앙정부인 막부가 나가사키에 세운 해군 전습소(가운데 건물들). 네덜란드 교관이 증기선 제작 교습과 해군 훈련을맡았다. 네덜란드 국기가 있는 쪽은 네덜란드 상관이 있는 인공섬 데지마다.
1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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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서구 제국주의에 일본 지도자들은 어떻게 대처했는가. ‘사이후이死而後已’로 했다. ‘죽어야 그치겠다’는 결사적인 결기로 새 시대를 준비했다.
1812
년1862
년1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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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치 100년 동안 쌓인 국내 모순은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1864
년1865
년임진왜란 때 불탄 조선왕조 법궁 경복궁. 대원군이 273년 만에 중건을 선언했다.
1867
년대원군이 발행한 돈으로 청전이 사용되기 직전에 사용함. 실질가치가 명목가치의 10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저질 화폐다.
1868
년1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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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제도 정비, 탐관오리 처단, 군사력 강화와 세도정치 혁파. 고종 등극 이듬해인 1864년부터 1873년까지 흥선대원군이 벌인 정치를 보면 왜 고종이 친정을 선언하게 됐는지 이유가 명확하게 보인다. “대원군이 10년 동안 집권하면서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라는 다섯 자가 삼천리강토를 풍미하였다. 그 위세가 우레와 불같으므로 모든 관리와 백성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항시 관청의 법을 우려하였다.”(황현, 매천야록)
1868
년대원군은 두 차례 양요를 겪으면서 독자적인 무기 개발 작업을 진행했다. 사진은 대원권이 운현궁에서 제작한 대포.
/국립중앙박물관
1873
년1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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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이하응이 조선을 지배한지 10년에서 한 달 모자라는 1873년 11월 5일. 운현궁에 사는 대원군 전용 출입문 공근문이 전격 폐쇄됐다. 닫은 사람은 아들 고종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열두 살 왕족에서 재위 10년을 막 넘길 참인 스물한 살짜리 당당한 최고 권력자로 성장한 아들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임대했던 권력을 그날로 회수했다.
1874
년 1904년 촬영된 고종 사진. 스코트랜드 화가 콘스탄스 테일러의 Koreans at Home 에 실린 사진이다.
/미국의회도서관
1875
년1876
년일본 군함 운요호가 공격한 강화도 초지진. 지금도 그 피격 흔적이 남아 있다.
1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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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강화도 진무영을 철폐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대원군은 가슴을 어루만지며
“이 군영이 국가에 무슨 해를 끼쳐서 그 장성長城을 파괴하는가?”라고 하였다.(황현, 매천야록)
1874
년대원군이 유통시킨 청전을 폐지한 뒤 급전직하한 재정난 타개를 위해 고종은 결국 실질가치가 명목가치의 5분의 1도 되지 않는 당오전을 찍어내 민생 파탄을 야기했다.
/국립중앙박물관
1875
년러일전쟁 종군기자인 로버트 던이 서울에서 150달러를 바꾸고 받은 엽전 꾸러미. 1904년 6월 4일 미국 주간지 <콜리어스>에 실린 사진이다. /Harthi Trust
1882
년“청나라 돈을 당초에 통용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물건은 귀해지고 돈은 천해져 지탱할 수가 없다. 백성들 상황을 생각하면 비단 옷과 쌀밥도 편안하지 않다. 이제부터 청나라 돈 통용을 전부 혁파하고 모든 세금은 상평통보로 거두라.”(고종실록)
1623
년1873
년1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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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익 아버지)
민씨들은 선혜청을 비롯한 이조, 호조, 병조와 형조 즉 인사와 재정, 군사와 치안, 사법, 형사 같은 이권과 권력을 휘두르는 부서장으로 활동하면서 국가 권력을 좌우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개혁(1894년) 같은 왕권이 약화된 계기 때마다 고종은 민씨들과 잠시 거리를 뒀고, 세상에서 이들을 잊을 만큼 시간이 지나면 민씨들을 반드시 다시 불렀다.
1882
년임오군란 민비 도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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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민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같이 탐욕스러웠다. 그런 민씨들이 전국 큰 고을의 수령 자리를 대부분 독차지했다. 평안도 관찰사와 삼도수군통제사는 이미 10년 넘게 민씨가 아니면 차지할 수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저 형식이라는 놈은 고금에 다시없는 탐관오리였다. 오죽했으면 백성들이 그를 ‘악귀’라고 불렀을까? 그것도 모자라 ‘미친 호랑이[狂虎광호]’라고 부르기도했다. 그가 사람을 산 채로 씹어 먹을 만큼 포악하다는 표현이었다.(황현, 매천야록)
1876
년1881
년1882
년▲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서 실질적인 총독 역할을 했던 청나라 관리 원세개가 쓴 이준 만가(輓歌)가 새겨져 있다.
1884
년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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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자신의 웅대한 지략을 자부한 나머지 불세출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권력을 다 거머쥐고 세상일에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자기가 우리 동방에 처음으로 난 군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황현, 매천야록)
1893
년1894
년산산조각난 시신이 왼쪽에 있다. 참수당한 목이 걸려 있고, 홍종우가 쓴 ‘대역부도옥균’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미국 헌팅턴대 도서관
19세기 말 조선 왕국은 국내외로 풍전등화, 침몰 일보 직전이었다.
청일전쟁 풍도해전과 성환전투를 그린 일본 목판화.
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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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군은 우금치 패전을 계기로 궤멸됐다.
영돈녕부사 김병시가 고종에게 힐난하였다. “다른 나라 군사를 불러들이면 조선 백성을 모두 죽이는 것이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후세가 보게 되면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고종이 이리 답하였다. “참으로 그렇구려!”그러자 김병시가 말하였다. “어찌 이런 나라가 있습니까!”(갑오실기)
1894
년1895년 김홍집 정부에서 일본으로 보낸 국비 유학생 모임 ‘대조선인 일본 유학생 친목회’ 단체 사진. 촬영 날짜는 1896년 1월 6일이고 장소는 주일 조선 공사관이다. /서울대도서관
두 사람 모두 아관파천 직후 길거리에서 맞아죽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작년 6월(양력 8월) 갑오개혁 이후 나온 칙령과 재가 사항은 어느 것도 내 의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철회한다.”(1895년 6월 25일 고종)
1895
년/게티이미지코리아
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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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
년총 비용이 적혀 있다.
1898
년/국립고궁박물관
1899
년/아모레퍼시픽박물관
1904
년기사보기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주도한 개혁가였다. /국사편찬위원회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이제 아침이 지나고 차갑고 음울한 침묵의 땅 (Land of the Cold Gray Calm of the Morning After)이 돼 버렸다. 호러스 알렌
1894
년경운궁과 미국공사관 사잇길로 지나가는 고종 어가 행렬. 고종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동은의학박물관
1895
년1896
년고종이 미국공사관에 공짜로 내준 길. 지금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고종의 길’이라고 부른다.
1897
년‘King's Library’로 표시된 공간은 현재 중명전이고, 그 오른쪽 위는 미국공사관이다. 알렌은 “황제가 도서관을 공사관 옆에 짓고 미국 보호를 받으려 했다”고 기록했다.
1898
년1904
년1905
년‘오늘 아침 왕이 사람을 보내 일본이 왕궁을 포위하고 측근을 압박하는 사실에 우려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또 자신이 공사관을 방문하면 비밀리에 찾겠다는 뜻을 알려왔다. 이럴 경우 왕을 받아들여도 되는가’.(1894년 7월 6일 주한영국총영사 가드너)
1904
년영국 잡지 ‘펀치(Punch)’에 실린 삽화. 러·일 양국이 조선 노인의 허리를 밧줄로 조이는 장면인데, ‘러일전쟁 와중에 조선이 엄중 중립(Strict Neutrality)을 선언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코넬대 디지털컬렉션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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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도고 헤이하치로의 친필을 받아 거제도 송진포에 세웠다. 지금은 거제 시청 창고에 보관 중이다.
그 아름다운 곳이 일본인들 환성으로 가득 찼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의 실정이 수치스럽게도 이 나라를 붕괴시켰다. 무엇보다 슬픈 일은 황제에게서도, 비굴하고 부패한 신하에게서도 끔찍하게 생기를 잃은 대중에게서도 조선의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1904년 5월 윤치호)
1882
년아버지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나라를 책임지거나 딸을 책임지거나 둘 중 하나는 할 수 있지만, 두 개 다는 못한다”고 포기했던 왈가닥이었다.
/코넬대 디지털컬렉션
1905
년1905년 5월 26일 창덕궁 주합루에서 일본인들이 벌인 경부선 개통 축하 가든파티에 동원된 대한제국 군악대.
/일로전쟁실기 한국사진첩
왕비 민씨릉인 홍릉 석물에 올라탄 앨리스.
/코넬대학교 디지털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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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어크미술관
앨리스 일행이 한국에서 한 일은 축제를 벌이고 만찬을 하고 환영연을 벌이고 야외파티를 하고 이 고대도시 바깥으로 말을 타고 놀러 다닌 것밖에 없었다. 한국인들은 이번 방문이 정치적으로 무슨 뜻이 있어서 미국 정부가 한국을 도와 위태로운 상황에서 꺼내 주리라고 생각한다.하지만 그런 바람은 사실과 거리가 아주 멀다.(1905, 호머 헐버트)
1904
년마시타케가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한 통감부 탁자.
/국사편찬위원회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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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을 감싸고도는 고종을 조병세는 죽음으로 각성시키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부산광역시립박물관
보호권 확립에 관한 조약체결을 위해 비용을 필요로 하겠기에 기밀비 10만 원을 송부하여 위 목적에 지출하라는 훈시 취지를 삼가 받았습니다. 이에 지난 11월 11일 대사 접대비 명의로 금 2만 원을 경리원 경 심상훈을 거쳐 무기명 예금증서로 황제 수중에 납입시켰습니다.(1905년 을사조약 직전,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
1907
년헤이그에서 세계 언론에게 “지난 정권의 학정을 일본이 바로잡아주리라 기대했으나 우리를 배신했다”라고 연설했다. 미국 인디펜던트지 1907년 8월 22일자.
1910
년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서울 남산 통감관저.
/부산박물관
1919
년1945
년첫번째줄: 왼쪽부터 고영희(탁지부), 이윤용(궁내부),영친왕, 민병석(시원종경), 송병준(농상공부)
두번째줄: 왼쪽부터 임선준(내부), 이재곤(학부), 이완용(총리), 이병무(군부), 조동윤(배종 무관장), 조중응(법무)
1947
년기사보기
소동파가 말하기를, 육국(六國)을 멸한 것은 육국이지 진나라가 아니며 진나라를 멸한 것은 진나라이지 천하가 아니라고 하였다.(양계초)
모든 시작은 모든 끝의 원인이다.
고종의 끝은 고종의 시작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