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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만악의 근원이다?

기사 박종인 기자
디자인 조선디자인랩 이민경·이연주·장슬기

누가 고종을 변호하는가. 아니 변호도 모자라 누가 고종을 자주 독립을 염원한 개혁 군주라고 찬양하는가.

고종 정권은 ‘냉정하게 직시하고 방향을 제대로 잡느냐의 싸움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구한말에 근대화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도 고종 때문이고, 그 근대화에 뒤쳐진 것도 고종 때문이다.

조선을 찾은 외국 사람들이 가난해서 불쌍하다고 혀를 찰 정도로 국가 경제가 파탄 난 것도 고종 때문이다. 고종은 만악의 근원이다.

  • 고종, 26대 조선 왕에 오르다
  • 1863

  • 익성군 입궁하던 날
    12월 8일 익성군 이재황, 26대 왕위 등극
  • 1866

  • 3월 21일 고종, 민비 혼인식
  • 서기 1864년 1월 16일 토요일, 음력으로는 1863년 12월 8일이다. 이른 아침 해뜰 무렵 철종이 죽었다. 차가운 공기를 헤치고 영의정 김좌근과 도승지 민치상이 일행을 이끌고 창덕궁 돈화문을 나섰다.

  • 장성(長城)
  • 1832

  • 이양선의 시대
    영국 상선 애머스트호 몽금포 앞바다 출현
  • 1840

  • 아편전쟁
    ▲ 아편전쟁

    1840년 청나라가 영국이 수출한 아편을 불태우자 이를 핑계로 영국이 무역항을 확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킴.

  • 1842

  • 청, 남경조약 통해 아편 무역 허용
  • 1860

  • 2차 아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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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세기 초부터 조선 바다에는 서양 상선과 군함이 출몰하며 새로운 시대를 알리고 있었다.
    대륙에서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무장한 유럽 제국이 황제 청나라를 위협하고 있었다. 바다 건너 일본은 그 유럽에 문호를 개방하고 근대 문명을 차근차근 수입하며 부국과 강병의 길을 걷고 있었다. 26대 지도자 고종이 친정을 선언한 1873년, 조선 왕국 나이는 481세였다.

  • 1641

  • 일본의 굴기
    200년 전인 1641년 나가사키 인공섬 데지마 네덜란드에 개방
    ▲ 해군 전습소

    1855년 일본 중앙정부인 막부가 나가사키에 세운 해군 전습소(가운데 건물들). 네덜란드 교관이 증기선 제작 교습과 해군 훈련을맡았다. 네덜란드 국기가 있는 쪽은 네덜란드 상관이 있는 인공섬 데지마다.

  • 1868

  • 메이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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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서구 제국주의에 일본 지도자들은 어떻게 대처했는가. ‘사이후이死而後已’로 했다. ‘죽어야 그치겠다’는 결사적인 결기로 새 시대를 준비했다.

  • 1812

  • 학정과 민란의 시대
    홍경래의 난
  • 1862

  • 진주 민란
  • 1869

  • 광양 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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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도정치 100년 동안 쌓인 국내 모순은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 1864

  • 흥선대원군의 개혁, 갑자유신
    노론 독재 폐지, 호포제 실시
    ▲ 흥선대원군
  • 1865

  • 만동묘 철폐
  • 경복궁 중건 시작
    ▲ 경복궁

    임진왜란 때 불탄 조선왕조 법궁 경복궁. 대원군이 273년 만에 중건을 선언했다.

  • 병인양요, 강화도 진무영 강화
  • 10월 16일 강화유수에 무신 임명
  • 1867

  • 6월 3일 경복궁 공사 위해 청전 (청나라 돈) 유통 양성화
    ▲ 당백전

    대원군이 발행한 돈으로 청전이 사용되기 직전에 사용함. 실질가치가 명목가치의 10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저질 화폐다.

  • 1868

  • 오페르트 도굴사건
  • 1871

  • 신미양요, 척화비 전국 설치
    ▲ 1871년 신미양요 광성보전투 직후 풍경
  • 서원 철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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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금 제도 정비, 탐관오리 처단, 군사력 강화와 세도정치 혁파. 고종 등극 이듬해인 1864년부터 1873년까지 흥선대원군이 벌인 정치를 보면 왜 고종이 친정을 선언하게 됐는지 이유가 명확하게 보인다. “대원군이 10년 동안 집권하면서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라는 다섯 자가 삼천리강토를 풍미하였다. 그 위세가 우레와 불같으므로 모든 관리와 백성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항시 관청의 법을 우려하였다.”(황현, 매천야록)

  • 1868

  • 운현궁에 열린 두 개의 문
    최익현, 대원군 갑자유신 철폐 상소
    ▲ 운현궁별주명대포

    대원군은 두 차례 양요를 겪으면서 독자적인 무기 개발 작업을 진행했다. 사진은 대원권이 운현궁에서 제작한 대포.
    /국립중앙박물관

  • 1873

  • 10월 25일 최익현, 대원군 축출 상소
    ▲ 최익현
  • 11월 4일 고종 친정 선언
  • 1874

  • 2월 13일 만동묘 전격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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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원군 이하응이 조선을 지배한지 10년에서 한 달 모자라는 1873년 11월 5일. 운현궁에 사는 대원군 전용 출입문 공근문이 전격 폐쇄됐다. 닫은 사람은 아들 고종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열두 살 왕족에서 재위 10년을 막 넘길 참인 스물한 살짜리 당당한 최고 권력자로 성장한 아들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임대했던 권력을 그날로 회수했다.

  • 출항하는 유령선
  • 1874

  • ▲ 고종

    1904년 촬영된 고종 사진. 스코트랜드 화가 콘스탄스 테일러의 Koreans at Home 에 실린 사진이다.
    /미국의회도서관

    무너진 장성, 진무영
    6월 20일 궁궐 수비대 무위소 출범
  • 7월 28일 고종, 강화유수에 다시 문신 임명
  • 1875

  • 8월 21일 일본 군함 운요호, 강화도 공격
  • 1876

  • 2월 강화도조약
    ▲ 강화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공격한 강화도 초지진. 지금도 그 피격 흔적이 남아 있다.

  • 고종, 강화도 진무영 예산 대폭 축소
  • 1877

  • 7월 15일 고종, 친위부대인 무위소에 전권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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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이 강화도 진무영을 철폐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대원군은 가슴을 어루만지며
    “이 군영이 국가에 무슨 해를 끼쳐서 그 장성長城을 파괴하는가?”라고 하였다.(황현, 매천야록)

  • 1874

  • 공포영화 같았던 화폐개혁과 가난
    1월 6일 고종, 청전(청나라 돈) 전격 폐지
    아버지 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두 번째 조치는 청나라 돈, 청전淸錢 폐지였다.
    육조판서는 물론 의정부 정승들과 단 한 마디 상의도 없었다.
    민간에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화폐를 단칼에 없애버리는 어마어마한 경제정책을, 금융 담당 부서와 일체 논의 없이, 당장 오늘부터 실시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유는 ‘백성을 위해서’였다.
    1881년 국고에 남은 청전이 44냥으로 줄었다. 이듬해에는 국고에 청전 보유량이 기록되지 않는다.
    ▲ 당오전

    대원군이 유통시킨 청전을 폐지한 뒤 급전직하한 재정난 타개를 위해 고종은 결국 실질가치가 명목가치의 5분의 1도 되지 않는 당오전을 찍어내 민생 파탄을 야기했다.
    /국립중앙박물관

  • 1월 13일 청전으로 유지하던 정부 재정 완전 고갈
    고종이 대신들과 정기회의인 차대를 열었다. 우의정 박규수는 작심하고 고종에게 말했다.
    “(이제까지) 청전을 폐지하지 못한 것은 국가 재정(公貨공화)이 모두 청전으로 쌓여 있어서 한번 혁파한 후에는 보충할 계책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내탕고에 쌓인 돈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계산하지 않고 시원하게 하루아침에 혁파하셨습니다. 그러나 재정은 밑천이 없고 민간 물품은 유통되는 못하게 되었으니 근심이 절급합니다.”
    “지금 관아에 있는 청전은 300만 냥(쌀 4500만 섬을 살 수 있는 돈)을 웃돕니다.”
  • 5월 고종, 무위소에는 청전으로 예산 지급 강행
    1874년 청전 폐지 직후 고종은 친위부대로 신설한 무위소에는 우선적으로 예산을 배정했다.
    그해 5월 고종은 무위소에 두 차례에 걸쳐 청전 10만 냥을 지급했다.
    6월에는 또 군복 구입예산으로 10만 냥을 지급했다. 8월에는 상평통보 4만 냥을 지급했다.
    11월에는 곳간이 텅 빈 호조로부터 58,400냥이 무위소로 넘겼다. 이듬해에는 연강세가 폐지된 강화도 진무영의 유일한 돈줄인 인삼세 가운데 4만 냥을 무위소로 배정해버렸다.
  • 1875

  • 3월 25일 고종, 경복궁 중건공사 강행
    아버지 대원군의 패착이라던 경복궁 공사를 재개했다. 정책 결정과 시행 목적이 무엇인지는 이제 명백하다.
    고종은 경제와 재정에 대해서 지식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벌인 언행에는 무능과 무식보다 더 심각한 이기심과 탐욕이 읽힌다.
    오직 자기만을 위한 작은 그림에 열중해 공동체를 위한 큰 그림을 외면하거나 지워버리는.
    불행하게도, 그 정책 방향과 무책임과 이기심은 망국亡國의 그날까지 스케일을 업그레이드하며 증폭됐다. 고종은 무능력한 지도자가 아니라, 사익을 위해 국가를 희생시키는 사악한 지도자였다.
    ▲ 엽전꾸러미

    러일전쟁 종군기자인 로버트 던이 서울에서 150달러를 바꾸고 받은 엽전 꾸러미. 1904년 6월 4일 미국 주간지 <콜리어스>에 실린 사진이다. /Harthi Trust

  • 1882

  • 13개월 월급 밀린 하급 군인들, 임오군란 일으킴
    1882년 6월 한성 왕십리와 이태원에 사는 하급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이다.
    청전 철폐가 야기한 재정난과 친위부대에 집착한 이기적인 군인 차별이 결합해 폭발시킨 군인들의 저항이다.
    무려 13개월 동안 월급을 받지 못한 하급 군인들이 벌인 저항이었고 권력에 대한 고종의 사악한 집착이 만든 반란이었다.
    고종이 심혈을 기울이던 친위부대 무위소 또한 이로 인해 붕괴됐다. 자기 안위와 권력에 눈이 멀어 자기 무덤을 파들어 간 것이었다.
  • “청나라 돈을 당초에 통용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물건은 귀해지고 돈은 천해져 지탱할 수가 없다. 백성들 상황을 생각하면 비단 옷과 쌀밥도 편안하지 않다. 이제부터 청나라 돈 통용을 전부 혁파하고 모든 세금은 상평통보로 거두라.”(고종실록)

  • 1623

  • 민씨, 고위직을 장악하다
    인조반정 때 서인들 밀약: 숭용산림과 물실국혼
  • 1873

  • 고종 친정 선언 후 노론세력 및 척족(처가) 여흥 민씨 중용
  • 1874

  • 1874~1880년대 주요 요직 여흥 민씨 독식
    1880년대 중앙과 지방 관직에 진출한 민씨 260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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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영익
    ▲ 민태호

    (민영익 아버지)

    ▲ 민영휘
  • 민씨들은 선혜청을 비롯한 이조, 호조, 병조와 형조 즉 인사와 재정, 군사와 치안, 사법, 형사 같은 이권과 권력을 휘두르는 부서장으로 활동하면서 국가 권력을 좌우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개혁(1894년) 같은 왕권이 약화된 계기 때마다 고종은 민씨들과 잠시 거리를 뒀고, 세상에서 이들을 잊을 만큼 시간이 지나면 민씨들을 반드시 다시 불렀다.

  • 조선을 고물로 만들다
  • 1882

  • “부패에 미친 호랑이와 망국으로 이끈 기생충들”
    고종, 신식군대 별기군 창설
    ▲ 별기군
  • 민겸호가 책임자인 선혜청, 하급군인 월급 13개월치 체불. 임오군란 발발
  • 군란 목표는 “모든 민씨들을 다 죽인다”. 민비, 장호원으로 도주
    ▲ 장호원

    임오군란 민비 도주지.

  • 민비, 무당 진령군과 함께 궁궐 복귀 1880년대부터 대한제국 건국 이후에도 민씨들은 부패의 상징
    - 민두호, 민영휘, 민영주 등 고종과 연합해 매관매직과 뇌물
    - 민씨들과 무당 진령군 처단 상소 잇달아
    - 민영휘는 일제시대 조선 최갑부 등극
    -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발화선이 된 민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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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반적으로 민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같이 탐욕스러웠다. 그런 민씨들이 전국 큰 고을의 수령 자리를 대부분 독차지했다. 평안도 관찰사와 삼도수군통제사는 이미 10년 넘게 민씨가 아니면 차지할 수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저 형식이라는 놈은 고금에 다시없는 탐관오리였다. 오죽했으면 백성들이 그를 ‘악귀’라고 불렀을까? 그것도 모자라 ‘미친 호랑이[狂虎광호]’라고 부르기도했다. 그가 사람을 산 채로 씹어 먹을 만큼 포악하다는 표현이었다.(황현, 매천야록)

  • 1876

  • 고종, “모두가 내 죄다”
    1월 23일 최익현, ‘지부상소’
    ▲ 최익현
  • 1881

  • 5월 15일 고종, 개방 뉘우치는 ‘척사윤음’
  • 1882

  • 6월 임오군란

    ▲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서 실질적인 총독 역할을 했던 청나라 관리 원세개가 쓴 이준 만가(輓歌)가 새겨져 있다.

  • 7월 20일 고종, 악정 반성하는 ‘죄기윤음’
  • 1884

  • 12월 갑신정변
    ▲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 12월 고종, 악정 재반성하는 ‘상찬윤음’
  • 1885

  • 청나라 장수 원세개, 조선 총독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 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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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은 자신의 웅대한 지략을 자부한 나머지 불세출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권력을 다 거머쥐고 세상일에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자기가 우리 동방에 처음으로 난 군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황현, 매천야록)

  • 1893

  • 3월 10일 동학교도 보은집회 : 최제우 신원 요구
    ▲ 만석보 말뚝 흔적
  • 3월 25일 고종, 어전회의에서 청나라 병사 청병 제의
  • 1894

  • 1월 10일 전북 고부, 조병갑 탐학에 동학전쟁 시작
    ▲ 부관참시 당한 김옥균

    산산조각난 시신이 왼쪽에 있다. 참수당한 목이 걸려 있고, 홍종우가 쓴 ‘대역부도옥균’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미국 헌팅턴대 도서관

  • 3월 9일 상해 암살 김옥균 시신 양화진 도착, 부관참시
  • 고종과 민씨들, 합동으로 청나라 군사를 불러들이다
    4월 22일(23일) 민영준(민영휘), 원세개에게 원병 최종 요청
  • 4월 27일 동학군, 전주성 함락
    ▲ 경복궁 근정전

    19세기 말 조선 왕국은 국내외로 풍전등화, 침몰 일보 직전이었다.

  • 4월 30일 고종, 어전회의에서 반대 뚫고 청나라 군사 청병 결정
  • 5월 4일 청나라 군사, 아산만 상륙
  • 5월 7일 일본군 제물포 상륙
  • 5월 12일 고종, “동학군 해산 않으면 처형” 포고문
  • 6월 23일 일본군 경복궁 난입
  • 6월 25일 풍도 앞바다에서 청일전쟁 발발
    ▲ 청일전쟁

    청일전쟁 풍도해전과 성환전투를 그린 일본 목판화.

  • 1895

  • 7월 3일 조병갑 등 동학 학정 책임자 모두 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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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주 우금치에 있는 동학혁명군 위령탑

    농민군은 우금치 패전을 계기로 궤멸됐다.

  • 영돈녕부사 김병시가 고종에게 힐난하였다. “다른 나라 군사를 불러들이면 조선 백성을 모두 죽이는 것이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후세가 보게 되면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고종이 이리 답하였다. “참으로 그렇구려!”그러자 김병시가 말하였다. “어찌 이런 나라가 있습니까!”(갑오실기)

  • 낭비 당한 태평성대
  • 1894

  • ~1895년 갑오개혁정부,
    봉건제도 철폐 및 개혁 착수(갑오경장)
    ▲ 대조선인 일본 유학생 친목회

    1895년 김홍집 정부에서 일본으로 보낸 국비 유학생 모임 ‘대조선인 일본 유학생 친목회’ 단체 사진. 촬영 날짜는 1896년 1월 6일이고 장소는 주일 조선 공사관이다. /서울대도서관

  • 낭비당한 10년
    7월 5일 고종-민비, 청나라에 밀사 파견 “일본 퇴치” 요청
    ▲ 갑오개혁의 주역 김홍집(오른쪽)과 어윤중(왼쪽)

    두 사람 모두 아관파천 직후 길거리에서 맞아죽었다.
    /국사편찬위원회

  • “작년 6월(양력 8월) 갑오개혁 이후 나온 칙령과 재가 사항은 어느 것도 내 의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철회한다.”(1895년 6월 25일 고종)

  • 10월 7일 고종-민비,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군주권은 백성을 마음대로 하는 권리” 주장
  • 12월 16일 고종, 군국기무처 대신 기존 의정부를 의결기관화
  • 12월 16일 고종, 상소 금지령
  • 1895

  • 양력 3월 23일 청일전쟁 종전 시모노세키조약 타결
  • 양력 8월 20일 민비 암살
    ▲ 민비

    /게티이미지코리아

  • 1896

  • 양력 2월 11일 고종, 러시아공사관으로 도주(아관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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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

  • 권력 독점의 완성: 대한제국
    2월 20일 고종, 경운궁으로 환궁
    ▲ 경운궁 현판
  • 3월 충청도 유생들 고종 폐위 시도 적발, 고종 조카 이준용 옹위 쿠데타 적발
    ▲ 경운궁중건도감의궤

    총 비용이 적혀 있다.

  • 9월 박영효 왕위 추대 적발
  • 10월 12일 고종, 대한제국 건국
  • 1898

  • 3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주최
    ▲ 대한제국 황제 고종

    /국립고궁박물관

  • 10월 28일 독립협회, 관민공동회 주최
  • 12월 25일 독립협회 강제 해산
  • 1899

  • 5월 고종, 연좌제 부활 시도
    ▲ 고종임인진연도8폭병풍(高宗壬寅進宴圖八幅屛風)

    /아모레퍼시픽박물관

  • 8월 17일 ‘대한국 국제’ 공포.
    모든 권리를 황제에 집중
    - 정치, 군사, 경제권 황제가 모두 장악
    - 부정부패, 매관매직, 무명잡세 횡행
  • 1904

  • 고종 등극 40주년 각종 기념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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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재필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주도한 개혁가였다. /국사편찬위원회

  •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이제 아침이 지나고 차갑고 음울한 침묵의 땅 (Land of the Cold Gray Calm of the Morning After)이 돼 버렸다. 호러스 알렌

  • 1894

  • 6월 18일 고종, 동학전쟁 중 미국공사관에 망명 요청
    ▲ 고종 어가 행렬

    경운궁과 미국공사관 사잇길로 지나가는 고종 어가 행렬. 고종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동은의학박물관

  • 1895

  • 10월 8일 왕비 민씨, 일본인에 의해 암살
  • 1896

  • 1월 21일 고종, 러시아공사관에 망명 요청
  • 성공한 망명, 아관파천
    2월 11일 고종, 러시아공사관으로 도주 ‘아관파천’
    ▼ 고종의 길

    고종이 미국공사관에 공짜로 내준 길. 지금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고종의 길’이라고 부른다.

  • 1897

  • 10월 12일 고종, 대한제국 건국
  • 10월 13일 미국공사 호러스 알렌, 본부에 ‘고종이 망명 요청했다’ 보고
    ▲ 호러스 알렌
    ▲ 1897년 9월 당시 미국공사 호러스 알렌이 그린 정동 지도

    ‘King's Library’로 표시된 공간은 현재 중명전이고, 그 오른쪽 위는 미국공사관이다. 알렌은 “황제가 도서관을 공사관 옆에 짓고 미국 보호를 받으려 했다”고 기록했다.

  • 12월 24일 고종, 내시 보내 미국공사관에 망명 재요청
  • 1898

  • 1월 23일 고종, 러시아공사관에 ‘망명 요청 없다’라고 부인
  • 1904

  • 1월 2일 알렌, ‘러일전쟁 발발하면 고종이 망명하겠다고 연락’ 보고
  • 2월 알렌, ‘고종이 또 망명 요청했다’라고 본국에 보고
  • 1월 프랑스공사관에 고종 숙소용 온돌방 만들었다는 소문
  • 2월 10일 러일전쟁 공식 발발
  • 1905

  • 11월 19일 알렌, ‘측근 통해 고종이 망명 요청’ 본국에 보고
  • ‘오늘 아침 왕이 사람을 보내 일본이 왕궁을 포위하고 측근을 압박하는 사실에 우려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또 자신이 공사관을 방문하면 비밀리에 찾겠다는 뜻을 알려왔다. 이럴 경우 왕을 받아들여도 되는가’.(1894년 7월 6일 주한영국총영사 가드너)

  • 고물을 팔아치우다
  • 1904

  • 황천항해
    1월 21일 고종, 러일전쟁 전시 중립 선언. 열강에 의해 거부
    ▲ 조선의 엄중 중립 선언

    영국 잡지 ‘펀치(Punch)’에 실린 삽화. 러·일 양국이 조선 노인의 허리를 밧줄로 조이는 장면인데, ‘러일전쟁 와중에 조선이 엄중 중립(Strict Neutrality)을 선언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 2월 23일 한일의정서 체결, 대한제국 영토 일본군에 사용허가
    ▲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창덕궁 주합루

    /코넬대 디지털컬렉션

  • 5월 6일 창덕궁 후원에서 일본군 전첩기념회
    ▲ 대한민국시대 창덕궁 주합루
  • 9월 20일 경부선 철도 공사 방해한 조선인 3명 일본군에 총살
    ▲ 1904년 9월 경부선 철도 훼손 사건으로 일본군에 의해 총살된 조선인들.
  • 10월 26일 고종, 일본군 위로 사절단으로 육군부장 권중현 파견
  • 1905

  • 5월 27일 대마도해전, 일본함대가 러시아함대 격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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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일전쟁 승전기념비

    1931년 도고 헤이하치로의 친필을 받아 거제도 송진포에 세웠다. 지금은 거제 시청 창고에 보관 중이다.

  • 그 아름다운 곳이 일본인들 환성으로 가득 찼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의 실정이 수치스럽게도 이 나라를 붕괴시켰다. 무엇보다 슬픈 일은 황제에게서도, 비굴하고 부패한 신하에게서도 끔찍하게 생기를 잃은 대중에게서도 조선의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1904년 5월 윤치호)

  • 1882

  • 5월 22일 청나라 중재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 앨리스 루스벨트

    아버지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나라를 책임지거나 딸을 책임지거나 둘 중 하나는 할 수 있지만, 두 개 다는 못한다”고 포기했던 왈가닥이었다.
    /코넬대 디지털컬렉션

  • 1905

  • 7월 27일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 일본 총리 가쓰라와 조선 관련한 비망록 교환
  • 공주, 하늘에서 내려오다
    9월 20일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딸 앨리스 방한
    ▲ 대한제국 군악대

    1905년 5월 26일 창덕궁 주합루에서 일본인들이 벌인 경부선 개통 축하 가든파티에 동원된 대한제국 군악대.
    /일로전쟁실기 한국사진첩

  • 9월 20일 앨리스, 고종 알현
  • 9월 21일 앨리스, 공사관 연회
  • 9월 22일 앨리스, 창덕궁 파티
  • 9월 23일 앨리스, 전차 시승
    ▲ 앨리스와 일행

    왕비 민씨릉인 홍릉 석물에 올라탄 앨리스.
    /코넬대학교 디지털컬렉션

  • 9월 25일 앨리스, 승마 여행
  • 9월 27일 앨리스, 민비릉인 홍릉 여행
  • 9월 30일 앨리스, 서울 출발
  • 11월 17일 2차 한일협약, 을사조약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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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이 앨리스에게 선물한 고종 본인 사진. 한국 사진 선구자 김규진이 촬영했다.

    /뉴어크미술관

  • 앨리스 일행이 한국에서 한 일은 축제를 벌이고 만찬을 하고 환영연을 벌이고 야외파티를 하고 이 고대도시 바깥으로 말을 타고 놀러 다닌 것밖에 없었다. 한국인들은 이번 방문이 정치적으로 무슨 뜻이 있어서 미국 정부가 한국을 도와 위태로운 상황에서 꺼내 주리라고 생각한다.하지만 그런 바람은 사실과 거리가 아주 멀다.(1905, 호머 헐버트)

  • 1904

  • 황제가 받은 뇌물 250억원
    2월 17일 고종, 러일전쟁 참전 일본군에게 창덕궁 병영으로 제공
    ▲ 주한영국공사 조던이 영국 외무장관 랜스다운에게 보낸 편지. ‘한일의정서 체결 후 고종이 일본 천황으로부터 30만엔을 받았다’는 민영환 면담 기록이다.
  • 2월 23일 조선 땅을 일본군 병영으로 제공하는 한일의정서 체결
  • 3월 20일 일본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 방한
  • 3월 22일 고종, 일본 천황이 준 30만엔 받음
  • 3월 22일 고종,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경부선 철도 기존 지분 보장받음
    ▲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시타케가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한 통감부 탁자.
    /국사편찬위원회

  • 3월 24일 고종, 이토 히로부미에게 대한제국 최고 훈장 수여
  • 7월 21일 고종이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에게 이토 히로부미 고문으로 초대 의사 피력
  • 11월 11일 고종,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이토 히로부미 접대비 명목 2만엔 (20억원) 수뢰
    ▲ 민영환과 명함에 남긴 유서

    /국사편찬위원회

  • 11월 17일 을사조약 체결
  • 11월 17일 이후 을사오적 처단 상소 봇물. 고종은 ‘별 일 아니다’라고 대답
  • 11월 30일 민영환 자결
  • 12월 1일 조병세 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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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병세가 자결 직전 올린 상소, 유소.

    을사오적을 감싸고도는 고종을 조병세는 죽음으로 각성시키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부산광역시립박물관

  • 보호권 확립에 관한 조약체결을 위해 비용을 필요로 하겠기에 기밀비 10만 원을 송부하여 위 목적에 지출하라는 훈시 취지를 삼가 받았습니다. 이에 지난 11월 11일 대사 접대비 명의로 금 2만 원을 경리원 경 심상훈을 거쳐 무기명 예금증서로 황제 수중에 납입시켰습니다.(1905년 을사조약 직전,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

  • 1907

  • 7월 8일 헤이그밀사 이위종, 연설
    ▲ 이위종

    헤이그에서 세계 언론에게 “지난 정권의 학정을 일본이 바로잡아주리라 기대했으나 우리를 배신했다”라고 연설했다. 미국 인디펜던트지 1907년 8월 22일자.

  • 7월 14일 헤이그밀사 이준 사망
  • 7월 20일 고종 강제 퇴위, 순종이 황제 즉위
  • 7월 24일 한일신협약(정미조약) 체결
  • 8월 8일 대한제국 정부, 이상설에 사형 이위종과 이준 종신형 선고
  • 1910

  •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 체결
    ▲ 서울 남산 통감관저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서울 남산 통감관저.
    /부산박물관

  • 8월 29일 한일병합 공포
  • 일본 왕족이 된 고종 가족
    8월 29일 고종과 순종 존비속,
    일본 천황가 왕족과 공족으로 편입
    - 왕공족 신분 보장
    - 왕공족 재산 보장
    - 왕공족으로 매년 180만엔
    세비 지급(조선총독부 예산은 5000만엔)
    ▲ 고종
  • 1919

  • 1월 21일 고종 사망
  • 3월 1일 만세운동
  • 4월 11일 상해임시정부 수립
  • 1945

  • 8월 15일 해방
    ▲ 1907년 일본으로 떠난 영친왕 이은과 대한제국 내각 기념촬영(중명전). 오른쪽 한복 차림은 퇴위당한 고종이다.

    첫번째줄: 왼쪽부터 고영희(탁지부), 이윤용(궁내부),영친왕, 민병석(시원종경), 송병준(농상공부)
    두번째줄: 왼쪽부터 임선준(내부), 이재곤(학부), 이완용(총리), 이병무(군부), 조동윤(배종 무관장), 조중응(법무)

  • 1947

  • 5월 3일 일본국헌법 시행
  • 일본국헌법에 의해 조선왕공족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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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동파가 말하기를, 육국(六國)을 멸한 것은 육국이지 진나라가 아니며 진나라를 멸한 것은 진나라이지 천하가 아니라고 하였다.(양계초)

▲ 1918년 일본에서 일시 귀국한 영친왕과 전임 황제 고종, 후임 황제 순종 및 조선귀족과 총독부 관리, 일본 장성들이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서울대박물관

모든 시작은 모든 끝의 원인이다.
고종의 끝은 고종의 시작에서 시작되었다.